“국내산맥이름 일제가 바꿨다”
작성일 18-08-01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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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안강 조회 86,999회 댓글 0건본문
“국내산맥이름 일제가 바꿨다”
-「대동여지도」연구 20년 … 이우형씨 곧 저서발간
태백산맥, 소백산맥, 차령산맥 ‥등 산맥 이름들은 일제 때 일본인 학자들이 제멋대로 붙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조선말기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조상들은 「산맥」대신 백두대간(白頭大幹), 장백정간(長白正幹), 호남정맥(湖南正脈) ‥등처럼 「대간(大幹)」,「정간(正幹)」,「정맥(正脈)」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또 산줄기의 위치와 분포도 지금과 달랐다.
이 같은 사실들은 지난 20여년 동안 우리나라 각종 지도를 제작하면서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집중 연구해 온 지리연구가 이우형(李祐炯)씨(52․광우당(匡祐堂) 대표․민학회(民學會) 회원)가 최근 탈고한 「대동여지도의 독도(讀圖)」에서 밝혀진 것이다.
「대동여지도의 ‥」는 김정호의 일생 및 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 관한 최초의 연구서이다. 이 책에서 이씨는 우리나라 전통사회에서의 「10리(里)」는 지금과 같이 4km가 아니라 5.4km였다는 사실, 우리나라 거리계산의 원점(原點)은 지금처럼 광화문 네거리의 비각(碑閣)옆이 아니라, 창덕궁 돈화문(敦化門)이었다는 사실도 아울러 밝혀냈다.
일제시대 이후의 지도에 나타난 우리나라 산맥의 분포와 대동여지도에서 강조한 산세(山勢)의 흐름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 이씨의 연구.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산경표(山經表)에 의해 그려진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우리나라 산세의 흐름(山經)은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하여 장백정간, 청북정맥(淸北正脈), 청남정맥(淸南正脈), 낙남정맥(洛南正脈), 해서정맥(海西正脈),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한북정맥(漢北正脈), 낙동정맥(洛東正脈),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한남정맥(漢南正脈), 금북정맥(錦北正脈),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금남정맥(錦南正脈), 호남정맥 등 대간 1개, 정간 1개, 정맥 13개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들은 단순히 지형을 나타내는 용어일 뿐 아니라 산-물과 관련된 우리 민족의 삶의 모습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다.
현재와 같은 산맥이름들이 사용도기 시작한 것은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분지로(小藤文次郞)이 1900년과 1902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전역을 답사한 후 제출한 보고서 「한국산악론」에서부터. 그의 답사목적은 제국주의 진출의 전초작업으로서 광산채굴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우리의 인문-자연환경과는 상관없이 단지 땅 속 내부의 지질구조선에만 따라 산맥을 긋고 일방적으로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그냥 사용돼오고 있다는 것이다.
「대동여지도의 ‥」에서 밝혀진 또 다른 사실은 조선 시대의 거리관념으로 볼 때 10리는 지금의 5.4km였다는 것. 이에 따르면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지금까지 알려진대로 16만분의 1이 아니라, 21만 6천분의 1이 된다. 이씨는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돈화문으로부터 종가(鐘街)를 거쳐 남대문까지의 거리가 「5리 6보」이며 「1천 8백 26보」로 표시돼 있는데 착안, 이 같은 결론을 얻어냈다.
이씨는 또 교과서, 백과사전 등에서 김정호가 「황해도 미천한 가문 출신이며 생활이 어려웠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것은 일제에 의해 조작된 오류라고 지적한다. 1934년 조선총독부간(刊) 조선어독본 5권에는 「김정호는 천민출신으로서 지도를 만들었으나 국가기밀을 누설했다는 죄로 사형당했다. 그러나 그의 대동여지도는 훗날 우리(일본)가 러-일 전쟁에서 싸울 때나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할 때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기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씨는 김정호가 당대 명문 출신의 실학자 최한기(崔漢綺)와 어려서부터 친구였던 점, 대동여지도같은 방대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재력과 지식이 뒷받침돼야 했던 점 등을 들어 이 같은 주장을 부인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김정호나 대동여지도에 관한 본격학술논문이 아직 한 편도 없다. 이씨는 『대동여지도에 담긴 과학성, 정밀성, 삶의 지혜는 지금 입장에서 보아도 감탄할 만 하다』며 『다방면의 학자들이 공동연구를 통해서라도 우리 본래의 지도를 되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박스 기사
이우형씨가 「대동여지도」와 「산경표(山經表)」(조선 후기 학자 신경준 찬(申景濬撰))를 토대로 작성한 옛날의 우리나라 산줄기(山經) 분포도. 지금의 산맥 분포도와 용어와 위치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김정호가 「대동여지전도」에서 『백두산은 조선 산맥의 조산(白頭山朝鮮山脈之祖山)』이라고 밝힌 바와 같이 모든 산줄기 즉 대간, 정간, 그리고 13개의 정맥은 모두 백두산에서 시작돼 한반도의 뼈(筋骨)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중추를 이룬 것이 백두산에서 태백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이르는 하나의 큰 산줄기인 백두대간. 모든 고지도의 제작은 일단 백두대간을 그리는데서 출발했다. 13개의 정맥은 큰 강의 유역을 이루었으며, 분수기(分水岐)로서 해안지방까지 뻗어 끝이 나고 있으며, 그 명칭의 일부를 반드시 강이름에서 따왔다. 우리 조상들에게는 산마루와 물줄기가 인체의 근골과 혈맥에 해당했다. 「물이 곧 산이요, 산이 곧 물」이라는 이 시대의 통념으로 우리 땅을 그려낸 대동여지도는 익숙지 않더라도 누구나 손쉽게 그 지형을 명확히 읽고 수리(水利)에 따른 농경과 산업, 교통, 풍습의 경계 등을 쉽게 파악, 실생할에 이용하게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일보. 1986/7/24일)
홈지기 덧붙임)
1. 위 글은 백두대간의 부활을 알리는 씨앗이 된 기사입니다. 지금 보면 평범한 이 기사를 발굴하여 소개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백두대간 부활의 출발점을 확인해보기 위해서입니다. 10여년의 세월을 통해 과연 백두대간을 둘러싼 여러 논의들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이우형 선생님의 첫 발걸음을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기사를 읽고 내린 결론은 ‘한 사람의 위대한 발걸음은 긴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입니다.
2. 이 기사 중에는 다음과 같은 다른 견해가 있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첫째, 대동여지도의 축척과 관련되어 몇 가지의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둘째, 산경표의 찬표자를 신경준으로 설명한 것과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다른 견해를 가진 분들은 대체로 이 책의 찬표 연대를 1800년대 전후로 보고 있습니다. 참고로 신경준의 생존 연대는 1712년에서 1781년까지입니다. 이우형 선생님도 산경표의 찬표자가 신경준이 아닐 것이라고 다른 곳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의 다른 내용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3. 기사 중의 한자는 필요에 따라 괄호 안에 넣거나 한글로 처리했습니다. (2003/09/15)
4. 기사에 실려있는 사진들을 첨부할 수 없어서, 사진이 첨부된 기사는 아래단에 한글 파일로 올립니다. 본디 모습의 기사을 보고 싶은 분들은 내려받기를 해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2018/08/01)
-「대동여지도」연구 20년 … 이우형씨 곧 저서발간
태백산맥, 소백산맥, 차령산맥 ‥등 산맥 이름들은 일제 때 일본인 학자들이 제멋대로 붙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조선말기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조상들은 「산맥」대신 백두대간(白頭大幹), 장백정간(長白正幹), 호남정맥(湖南正脈) ‥등처럼 「대간(大幹)」,「정간(正幹)」,「정맥(正脈)」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또 산줄기의 위치와 분포도 지금과 달랐다.
이 같은 사실들은 지난 20여년 동안 우리나라 각종 지도를 제작하면서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집중 연구해 온 지리연구가 이우형(李祐炯)씨(52․광우당(匡祐堂) 대표․민학회(民學會) 회원)가 최근 탈고한 「대동여지도의 독도(讀圖)」에서 밝혀진 것이다.
「대동여지도의 ‥」는 김정호의 일생 및 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 관한 최초의 연구서이다. 이 책에서 이씨는 우리나라 전통사회에서의 「10리(里)」는 지금과 같이 4km가 아니라 5.4km였다는 사실, 우리나라 거리계산의 원점(原點)은 지금처럼 광화문 네거리의 비각(碑閣)옆이 아니라, 창덕궁 돈화문(敦化門)이었다는 사실도 아울러 밝혀냈다.
일제시대 이후의 지도에 나타난 우리나라 산맥의 분포와 대동여지도에서 강조한 산세(山勢)의 흐름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 이씨의 연구.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산경표(山經表)에 의해 그려진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우리나라 산세의 흐름(山經)은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하여 장백정간, 청북정맥(淸北正脈), 청남정맥(淸南正脈), 낙남정맥(洛南正脈), 해서정맥(海西正脈),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한북정맥(漢北正脈), 낙동정맥(洛東正脈),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한남정맥(漢南正脈), 금북정맥(錦北正脈),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금남정맥(錦南正脈), 호남정맥 등 대간 1개, 정간 1개, 정맥 13개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들은 단순히 지형을 나타내는 용어일 뿐 아니라 산-물과 관련된 우리 민족의 삶의 모습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다.
현재와 같은 산맥이름들이 사용도기 시작한 것은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분지로(小藤文次郞)이 1900년과 1902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전역을 답사한 후 제출한 보고서 「한국산악론」에서부터. 그의 답사목적은 제국주의 진출의 전초작업으로서 광산채굴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우리의 인문-자연환경과는 상관없이 단지 땅 속 내부의 지질구조선에만 따라 산맥을 긋고 일방적으로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그냥 사용돼오고 있다는 것이다.
「대동여지도의 ‥」에서 밝혀진 또 다른 사실은 조선 시대의 거리관념으로 볼 때 10리는 지금의 5.4km였다는 것. 이에 따르면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지금까지 알려진대로 16만분의 1이 아니라, 21만 6천분의 1이 된다. 이씨는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돈화문으로부터 종가(鐘街)를 거쳐 남대문까지의 거리가 「5리 6보」이며 「1천 8백 26보」로 표시돼 있는데 착안, 이 같은 결론을 얻어냈다.
이씨는 또 교과서, 백과사전 등에서 김정호가 「황해도 미천한 가문 출신이며 생활이 어려웠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것은 일제에 의해 조작된 오류라고 지적한다. 1934년 조선총독부간(刊) 조선어독본 5권에는 「김정호는 천민출신으로서 지도를 만들었으나 국가기밀을 누설했다는 죄로 사형당했다. 그러나 그의 대동여지도는 훗날 우리(일본)가 러-일 전쟁에서 싸울 때나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할 때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기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씨는 김정호가 당대 명문 출신의 실학자 최한기(崔漢綺)와 어려서부터 친구였던 점, 대동여지도같은 방대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재력과 지식이 뒷받침돼야 했던 점 등을 들어 이 같은 주장을 부인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김정호나 대동여지도에 관한 본격학술논문이 아직 한 편도 없다. 이씨는 『대동여지도에 담긴 과학성, 정밀성, 삶의 지혜는 지금 입장에서 보아도 감탄할 만 하다』며 『다방면의 학자들이 공동연구를 통해서라도 우리 본래의 지도를 되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박스 기사
이우형씨가 「대동여지도」와 「산경표(山經表)」(조선 후기 학자 신경준 찬(申景濬撰))를 토대로 작성한 옛날의 우리나라 산줄기(山經) 분포도. 지금의 산맥 분포도와 용어와 위치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김정호가 「대동여지전도」에서 『백두산은 조선 산맥의 조산(白頭山朝鮮山脈之祖山)』이라고 밝힌 바와 같이 모든 산줄기 즉 대간, 정간, 그리고 13개의 정맥은 모두 백두산에서 시작돼 한반도의 뼈(筋骨)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중추를 이룬 것이 백두산에서 태백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이르는 하나의 큰 산줄기인 백두대간. 모든 고지도의 제작은 일단 백두대간을 그리는데서 출발했다. 13개의 정맥은 큰 강의 유역을 이루었으며, 분수기(分水岐)로서 해안지방까지 뻗어 끝이 나고 있으며, 그 명칭의 일부를 반드시 강이름에서 따왔다. 우리 조상들에게는 산마루와 물줄기가 인체의 근골과 혈맥에 해당했다. 「물이 곧 산이요, 산이 곧 물」이라는 이 시대의 통념으로 우리 땅을 그려낸 대동여지도는 익숙지 않더라도 누구나 손쉽게 그 지형을 명확히 읽고 수리(水利)에 따른 농경과 산업, 교통, 풍습의 경계 등을 쉽게 파악, 실생할에 이용하게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일보. 1986/7/24일)
홈지기 덧붙임)
1. 위 글은 백두대간의 부활을 알리는 씨앗이 된 기사입니다. 지금 보면 평범한 이 기사를 발굴하여 소개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백두대간 부활의 출발점을 확인해보기 위해서입니다. 10여년의 세월을 통해 과연 백두대간을 둘러싼 여러 논의들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이우형 선생님의 첫 발걸음을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기사를 읽고 내린 결론은 ‘한 사람의 위대한 발걸음은 긴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입니다.
2. 이 기사 중에는 다음과 같은 다른 견해가 있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첫째, 대동여지도의 축척과 관련되어 몇 가지의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둘째, 산경표의 찬표자를 신경준으로 설명한 것과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다른 견해를 가진 분들은 대체로 이 책의 찬표 연대를 1800년대 전후로 보고 있습니다. 참고로 신경준의 생존 연대는 1712년에서 1781년까지입니다. 이우형 선생님도 산경표의 찬표자가 신경준이 아닐 것이라고 다른 곳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의 다른 내용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3. 기사 중의 한자는 필요에 따라 괄호 안에 넣거나 한글로 처리했습니다. (2003/09/15)
4. 기사에 실려있는 사진들을 첨부할 수 없어서, 사진이 첨부된 기사는 아래단에 한글 파일로 올립니다. 본디 모습의 기사을 보고 싶은 분들은 내려받기를 해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2018/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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