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 연구가 '신산자(新山子)' 이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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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강 댓글 0건 조회 88,407회 작성일 18-09-05 14:26본문
고지도 연구가 '신산자(新山子)' 이우형
김 영 철
이우형 (李祐炯)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그를 처음 만나 물어봤더니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주위에선 그를 '고지도 연구가'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막상 이우형 자신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지도 제작이 주업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있어 고지도 연구는 큰 축이다. 이런 그를 단순히 지도제작자로 호칭하기엔 그가 남긴, 그리고 남기고 있는 족적이 너무 크다.
이우형(사진 : 생전의 이우형 선생님) 그가 지난 90년 고산자 (古山子) 김정호 (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대작업을 완성했을 때 그를 두고 주변에선 '신산자 (新山子)'라고 불렀다. 김정호의 뒤를 이었다는 의미로, 김정호의 호인 고산자에 운을 맞춘 표현이다.
그를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이런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의 언변이 양파껍질 같다라는 것. 말을 처음에는 잘 하지 않다가 조금씩 조금씩, 그리고는 천천히 크게 자기의 소리를 내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혼자서 외롭게, 그리고 묵묵히 매달리고 있는 한 '구도자'의 습벽에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우형 (66)의 지난 20여년간의 인생은 이 나라 땅의 모습을 종이에 정확하게 옮기기 위한 노력의 기간이다. 이런 점에서 김정호와는 땔래야 땔 수 없는 인연이다. 그도 김정호가 친구같은 느낌이 든다고 한다. <대동여지도>완성과 '김정호 복원' 등 그가 온갖 정성과 노력을 다해 온 일들이 모두 김정호와 관련된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정호와의 인연 -- <대동여지도>를 완성하기까지
그와 김정호와의 인연은 그가 '지도 만들기'에 나서면서 부터다. 이우형의 지도인생은 그가 걸출한 산악인이었다는 점과 연관이 있다. 그는 대한산악연맹의 서울시연맹 구조대장을 지낼 정도로 젊은 시절을 산에서 보내다시피 했다. 산을 많이 다니다 보니 자연 지도를 공부하게 되고 또 많이 구입하게 되면서 지도에 익숙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지난 70년대 중반 신문사에 잠시 몸 담았던 경력과 이런 저런 일로 '산수 (山水)'라는 등산잡지를 발간하게 된 것이 지도인생의 한 사단 (事端)이 된다.
잡지사가 경영난으로 6개월만에 문을 닫게 됐는데 일 년치 구독료를 선불로 받은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고민 끝에 이우형은 평소 산행경험으로 쌓아 둔 자료를 바탕 으로 4색 컬러 등산용 지도를 부록으로 만들어 마지막 호 잡지와 함께 독자들에게 보낸다. "못 보내 드리는 잡지는 이 부록으로 대신해 달라"는 사과문과 함께. 그런데 이 지도가 예상외의 큰 호응을 얻었고 이를 계기로 그는 지도제작자의 길에 접어 든 것이다.
그 무렵 나온 경주와 제주도의 문화재지도는, 이를테면 그의 지도제작자로서의 첫 '작품'들이다. 당시 만든 경주와 제주도의 문화재지도는 그가 처음으로 '현장주의 지도'의 기법을 써 만든 것이다. 예컨대 제주도 성판악의 경우 현지에서 쓰는 말인 '성널오름'으로 표기하는 방법을 썼다.
그러다가 80년초에는 '광우당'이라는 전문 지도제작회사를 직접 운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채산성에 관계없이 제대로 된 지도를 추구하는 그의 성격상 얼마 안 있다 문을 닫는다. 당시 그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지도교과서인 '사회과 부도'를 제작할 정도의 전문인이 됐다.
이 무렵 이우형은 김정호를 만난다. 국토를 그리는 지도는 물론 역사를 아우르는 지도를 만들다 보니 피해갈 수 없는 것이 바로 고산자와 <대동여지도>였다는 이우형의 회고다. 이우형이 <대동여지도>를 처음 대한 것은 70년대 말. <대동여지도>를 대하면서 이우형은 놀라고 또 놀란다. 김정호의 '지도관'이 자신의 것과 맥이 통한다는 것을 느낀다.
"목판본 <대동여지도>를 살펴보는 사이 이 것이 보통 정성과 뜻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에게 헬리콥터를 한 대 주고 해보라고 해도 10년 세월은 족히 걸리겠다 싶었어요. 이와 함께, 도대체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방대한 작업에 손을 댔을까 하고 궁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대동여지도>를 보면서 이우형이 공감한 것은 그 <대동여지도>가 갖는 이른바 산경수경 (山經水經)의 개념.
"지도는 땅만을 그려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그 땅을 보는 심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땅의 환경은 유일한 것이고 우리식 표현이 있었을 것입니다. 등고선식으로 그린 오늘날의 서양식지도와는 달리 우리 선조들은 산경수경을 지도에 담았습니다. 이는 물줄기 중심의 산줄기 개념입니다. 지도는 읽기에 따라 수 없는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권 식생 문화 기후 농경권역은 단순한 등고선식 지도로는 알 수 없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이 모든 것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때를 기점으로 이우형은 <대동여지도>를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고지도 연구에 들어 가면서 <대동여지도>의 완성작업에 매달린다. 김정호는 당시 목각의 어려움 때문에 <동여도(東輿圖)>상의 옛 지명을 <대동여지도>에 다 넣지 못했다. 이우형은 이를 <대동여지도>에 몽땅 옮겨 놓는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생계는 팽개친 채 박물관과 도서관, 개인소장 등을 뒤지는 일과 답사 등 <대동여지도> 완성을 위한 각고의 10년을 보낸다. <대동여지도>의 기본도로서 현존하는 필사본이 세 벌에 불과한 <동여도>를 규장각, 국사편찬위원회 등으로 찾아가 일일이 손으로 베끼는 고역도 치러낸다.
그 기간동안 그는 우리나라 48개 국도 중 20개 정도를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 봤고 한강탐사도 했다. 때로는 허름한 옷차림과 보따리 나침반 지도 도시락 이런 것들 덕분에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다.
이 완성작업의 한 단순과정으로 이우형은 우선 85년 '<대동여지도> 영인본'을 제작, 발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우형의 연구는 많은 난관에 부닥친다. 이우형은 80년대 초 서울 인사동 고서점에서 우연히 우리나라 옛 지리서인 '『산경표』 (山經表)'를 발견한다. 그는 1769년 전북 순창출신인 여암 (旅菴) 신경준 (申景濬)이 펴낸 이 책을 <대동여지도>와 비교하며 연구에 들어가는데 서로 맞지가 않는 것이었다. 『산경표』상의 것과 <대동여지도>상의 것이 서로 틀린 것으로 돼 있는 것이었다.
왜 그런가. 이우형은 몇 날 밤을 새운 끝에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산을 우리적인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산은 영어에서 말하는 마운틴(mountain)이나 일본의 야마와는 다른 개념의 것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산을 정상(peak)의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있지만 우리 선조들은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 우리 옛 산의 개념, 즉 산경원리에서 이르는 우리 산의 뜻은 그 산자락 앞의 들까지를 포용한 하나의 덩치(규모) 였다는 것과 그 모두를 두고 어느 곳이든지 그 산의 이름으로 불렀다 는 것이다. 이런 개념으로 <대동여지도>에 대입을 하니 신통할 정도로 맞아 떨어지더라는 것이다.
이우형은 이같은 개념을 근본이론으로 족보형식으로 지도화한 산경도도 제작해 낸다. 또 하나 현대지형 산경도(그림 : 산경도) 도에서도 잘 나타나지 않은 능선줄기가 <대동여지도>에는 명확하고도 큰 선으로 나타난 지역이 있다는 점도 이우형을 날 밤으로 새게 하는 의문이었다.
한남정맥 끝 부분의 김포평야 일대가 특히 그랬다. 그 밋밋한 논바닥에 무슨 이렇게 굵은 산줄기가 있단 말인가. 이우형은 답답증에 자다 말고 일어나 "어디, 고산자 당신의 혼백이라도 있으면 나와 보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는 직접 답사에 나섰다. 김포평야에 가서 논의 모양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얼핏 보기에 거의 수평면인 김포평야였지만, 그 평야를 동서로 나누는 이른바 유역능선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이 유역능(선)을 확인한 순간이 전 작업을 통해 가장 감격적이었다고 이우형은 회고한다.
이러한 숱한 난관 끝에 이우형은 90년에 <대동여지도>를 완성해 낸다. 이우형은 김정호가 목각상의 어려움 때문에 <동여도>상에는 총 19,000여개였던 지명 가운데 7,400여개를 뺀, 11,700여개만 <대동여지도>에 판각했는데, 이우형이 이 누락된 지명을 일일이 확인해 추가시킨 <대동여지도> 3분의 2 축소판을 완성한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대동여지도>의 독도'라는 책자도 함께 발행, <대동여지도>의 가치를 새롭게 부각시킨다. 이우형에 의해 실로 100여년만에 김정호의 완전한 뜻이 이뤄진 것이다.
당시 이우형의 <대동여지도>는 풀 사이즈 크기로 국립박물관에 전시된다. 그의 이 작업은 김정호 <대동여지도>의 완성이라는 것 외에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각종 국학관계의 연구는 물론 앞으로 절실히 필요해질 국지기상예보 등에도 좋은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다.
김정호 복원에 바친 각고의 15년, 그리고 백두대간을 위하여
<대동여지도>의 완성작업을 하면서 그는 줄곧 김정호와 함께 있었다. 의문이 나면 혼자서 묻기도 하고 짜증이 나면 대들기도 했다. 이우형의 <대동여지도> 완성은 전생에 어떤 관계였던 간에 이우형과 김정호의 끈질긴 인연이 가져다 준 우연찮은 '사건'으로 꼽힐만 하다. 이우형의 10여년간에 걸친 <대동여지도> 완성작업은 어떤 의미에서 '김정호 제 모습 찾기'의 한 축일 수도 있을 것이며, 그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훌륭한 지도를 만든 자랑스런 우리 조상 김정호.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그의 일대기를 잘못 알고 왔고, 지금까지도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우형이 들려주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김정호 이야기는 이러했다.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지도 그리기를 좋아했고, 지도를 구하러 한양으로 올라와 대궐 안 규장각에서 지도를 얻어본 결과 실제 지형과 지도가 너무나 차이 나는 것을 확인했고, 이에 정확한 지도 만들기를 필생의 사업으로 정해 평생동안 백두산을 여덟 번 올랐고... 예순이 되던 1861년 <대동여지도>의 판목을 완성했으나 대원군이 다른 나라에 국내사정을 누설시키는 것으로 오해하는 바람에 옥에 갇혀 숨을 거두었고 판목도 압수당해 폐기됐고..."
이우형은 단언한다.
"김정호는 전국을 뺑뺑 돌지도, 백두산을 여덟차례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지도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 때문에 옥에 갇히지도 않았고 판목이 폐기되지도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런 기록은 우리 역사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대부분 왜 그렇게 알고 있었을까. 이우형은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1990년도판 전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렇게 기술돼 있었다. 그 당시까지 '조선인들은 그렇게 우매한 위정자와 뒤떨어진 과학기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지배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일제의 식민사관 교육의 잔재가 김정호의 인생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우형은 이를 바로 잡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 한다. 그 노력 중의 하나가 바로 목판 발견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목판은 1931년까지도 존재하는 것으로,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이것이 1934년판 조선어 독본에서 불타 없어졌다는 식으로 기술된 배경에는 바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위한 '의도된 왜곡'이 있었던 것이다.
30년대까지는 분명히 남아 있던 목판들이 어디 갔을까. 이곳 저곳의 지인들에게 협조를 부탁해 놓은 이우형에게 희소식을 전한 사람은 서지학자 이종학 (李鍾學) (전 독도박물관장)이었다. 해방당시 일제로부터 우리측으로 문화재가 인수.인계되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대동여지도> 목판본 인계서를 제공해온 것이다. 이를 토대로 이우형은 또 다시 숱한 탐문과 조사를 통해 마침내 95년 12월 그렇게도 찾던 <대동여지도> 목판 11장을 찾아낸다. 없어졌을 것이라는 통설 속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던 목판들이 이우형의 집념어린 노력 끝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물증을 확보해 낸 이우형은 그러나 마음이 차지 않았다.
"내 자신이 고산자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 중에서도 잠깐만 다른 생각을 하다 보면 '김정호는 그래도 전국을 답사했을 거야' '옥에 갇혀 숨진 게 맞을 거야' '목판은 불탔을 거야'하는 기존의 선입견이 문득문득 떠 오르더군요. 초등학교 때 받은 교육이 얼마나 머리 속 깊이 각인되는지에 대해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김정호에 대한 왜곡된 기술을 하고 있는 교과서가 있는 한 김정호의 모습은 계속 일그러져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우형은 교과서의 김정호 편 개정을 위해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 붙인다. 함께 뜻을 같이한 국사편찬위의 이상태 (李相泰)박사, 성신여대 지리학과의 양보경 (楊普景) 교수 등의 도움을 받아 당시 초등학교 국어교과서를 담당하고 있던 한국교육개발원 이인제 (李寅濟)박사 등 교과서 관련 인사들에게 자신이 수집한 자료와 교과서를 바꿔야 할 근거 등이 적힌 서류들을 보내기도 했고, 이들을 직접 만나 설득하기도 여러 번. 한 때는 논란의 소지가 많다는 이유로 김정호 부분이 아예 교과서에서 삭제될 위기에까지 처하기도 했다. 이우형으로서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김정호의 인생이 1934년 조선총독부의 조선어독본 제작이후 60년이상 일본의 식민사관에 이용된 것도 억울한데, 이 분야 한국사에 둘도 없는 그의 인생과 업적을 없는 것으로 하자니 기가 막힌 일이었지요."
그러나 이우형은 이에 주저 앉지 않고 교육계 등을 대상으로 집요한 설득작업을 계속한다. 중학교와 지리등 다른 과목 교과서 필자에게까지 로비를 벌일 만큼 열심이었던 그의 김정호에 대한 집념은 끝내 97학년도 5학년 1학기 교과서에 김정호의 개정된 진짜 이야기를 실리게 하는 결실을 거둔다.
이우형은 그해 11월 초 김정호를 기리는 차례모임을 주관한다. 그는 술을 올리면서 이렇게 고했다.
"선생님, 후손으로서 해드려야 할 최소한 예의를 50년만에야 차렸습니다. 이제 선생님의 어린 후손들은 재대로 된 선생님 모습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마음 편히 쉬십시오."
이우형은 그러나 아직도 김정호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학계는 그런대로 되고 있지만, 아직도 김정호에 관해 모르는 부분들이 너무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우형은 김정호가 60 나이에 겨우겨우 나무를 구해가며 혼자 힘으로 높이가 6m60cm나 되고 목판개수는 1백20여개나 되는 거대한 지도 목판을 판 것은 그의 나라와 땅과 백성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강조한다.
"김정호의 다른 지도인 청구도 (靑邱圖) 서문에 보면 고산자는 '애국이란 그 땅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그 땅에 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땅을 사랑하려면 땅의 됨됨이를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지도와 지리지를 온 백성이 보아야 한다는 게 고산자의 생각이었죠.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도 온갖 어려움에 시달리며 나무를 파고 또 고치고 또 파고 하는 고산자의 10년 집념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고지도 연구가로서 또한 지도제작자로서 이우형은 지도 만들기와 관련해 '생활지리'를 강조한다. 지도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과 땅과 산과 물을 보는 심성이 나타나 있는 만큼 산수경 (山水經)의 개념을 바탕으로 해야 하며, 이를 도외시하면 그 시절 사람이 그 땅에 살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지리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는 산줄기의 개념이 아직까지 산맥 개념으로 다뤄지고 있는 점을 안타까워 했다.
"한시 바삐 이 땅의 산줄기를 지도상에 제대로 표기하는 일도 본격화돼야 합니다. 우리 지리교과서상의 복잡한 산맥구도와 이름은 일본식 표현입니다. 우리 선조는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을 하나의 등줄기로 보고 (장백) 정간 하나와 13정맥으로 국토를 파악했습니다."
우리 산과 백두대간을 얘기하는 이우형은 산꾼 그 모습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그동안 잊혀져 왔던 백두대간을 『산경표』 등 고서적에서 찾아내 문제를 제기한 것도 다름 아닌 이우형이다. 그는 『산경표』를 통해 우리의 고유한 지리개념인 1대간 1정간 13정맥을 발굴하는 뜻 깊은 일을 해냈다.
"원론적으로 아직 정립이 안된 상태입니다. 나는 개념 정도를 파악해냈을 뿐이고... 우리는 지금까지 일제가 지하자원의 수탈을 위해 세운 태백산맥이니 차령산맥이니 하는 지리개념을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질학에서나 필요한 개념이지 우리 강토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는 거의 무용지물인 것입니다. 산에서 비롯된 물줄기의 흐름이 바뀌면 기후나 토양도 바뀌며 거기에 기대어 사는 사람의 품성도 바뀌는 것인데, 우리는 어처구니 없게도 그 일제의 지리개념에 의해 무감각해진 채 별 생각없이 우리 땅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이우형은 요즘 들어 산악인들을 중심으로 백두대간의 개념이 널리 확산되고 있고, 이와 함께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산행이 많아지고 있는 점은 우리 국토를 알고 사랑하는 차원에서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각종 난개발로 인해 백두대간이 망가지고 파헤쳐지고 있는데 대해서는 분노을 표했다.
이즈음 그가 정성을 쏟고 있는 작업은 산수경에 관한 책의 집필이다. 우리 지도의 기본개념인 산수경에 관해 그동안 말로만 해왔는데, 이제는 이를 이론으로 정립해 널리 알리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책을 집필 중에 있다. 이와 함께 그는 그의 본업인 지도제작도 하고 있다. 문화재지도를 의뢰받아 제작하고 있는데, '경주유적분포도' (5 천분의 1)는 완료했고, 지금은 안동대의 의뢰로 '안동지역 문화재지도'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이우형은 자신이 한 일, 그리고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말을 아끼는 편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는 겸손함의 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겸손함의 뒤에는 뭐라고 딱 꼬집을 수 없는 감정이 배여 있음이 느껴진다. 시니시시즘 (냉소주의) 같기도 하고 저항감 같기도 한... 그는 김정호를 연구하고, <대동여지도>를 완성하고, 산수경 개념의 우리 지도를 연구하면서 거의 사재를 쏟아 붇다시피 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당하고 느낀 고초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와 만나는 과정에서 그는 '혼자 할 수 없는 일' '해도 누가 인정을 해 주겠는가' '개인적으로 연구하는 것 한계가 있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이우형은 그가 <대동여지도> 연구를 위한 답사과정에서 한강탐사를 함께 했던 한강의 마지막 뱃사공 우동봉 노인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한강의 마지막 뱃사공으로서 그 노인이 갖고 있던 자기 일에 대한 굉장한 자부심과 자존심에 얽힌 얘기들. 웬 뜬금없는 얘기인가 할 정도로, 그 노인의 얘기는 김정호라든가 <대동여지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우형을 몇 차례 만나고 한참을 지나 생각을 해보니 왜 그가 우동봉 노인 얘기를 했는지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것은 자신이 해놓은, 그리고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그 나름의 자부심의 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우동봉 노인이 뱃전에서 한강을 바라다 보면서 '이 한강 내꺼여!'라고 한 말을 이우형에 대입시켜 보면서 '아,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 글쓴이/ 김영철 선생 약력
1951년생
마산 중고등학교, 중앙대 신방과 졸업
1977년 내외통신 견습기자로 언론계 생활을 시작해 내외통신 국제부차장,
부산매일신문 정치부차장과 부장을 역임하며 21년간 언론사계에 종사.
1998년부터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
홈지기 덧붙임)
* 이 글은 고 이우형 선생님에 대해 가장 잘 정리해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선생님의 유지를 조금이나마 받들겠다는 다짐이 홈지기에게는 있습니다.
** 이 글은 '슈룹의 백두대간' 중에 실려 있는 것입니다. 슈룹에서는 글쓴이인 김영철님께 게재를 허락받았고, 현재 저희는 슈룹의 홈지기를 통해 글의 이용을 허락받은 상태입니다. 사진과 그림은 월간 「불광」(1996년 8월호)의 인터뷰 기사에 실려 있는 것으로 해당 출판사의 이용을 허락 받았습니다.
*** 글의 중간에 등장하는 『산경표』의 저자가 여암 신경준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산경표』가 신경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만은 확실합니다. (2003/09/15)
김 영 철
이우형 (李祐炯)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그를 처음 만나 물어봤더니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주위에선 그를 '고지도 연구가'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막상 이우형 자신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지도 제작이 주업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있어 고지도 연구는 큰 축이다. 이런 그를 단순히 지도제작자로 호칭하기엔 그가 남긴, 그리고 남기고 있는 족적이 너무 크다.
이우형(사진 : 생전의 이우형 선생님) 그가 지난 90년 고산자 (古山子) 김정호 (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대작업을 완성했을 때 그를 두고 주변에선 '신산자 (新山子)'라고 불렀다. 김정호의 뒤를 이었다는 의미로, 김정호의 호인 고산자에 운을 맞춘 표현이다.
그를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이런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의 언변이 양파껍질 같다라는 것. 말을 처음에는 잘 하지 않다가 조금씩 조금씩, 그리고는 천천히 크게 자기의 소리를 내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혼자서 외롭게, 그리고 묵묵히 매달리고 있는 한 '구도자'의 습벽에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우형 (66)의 지난 20여년간의 인생은 이 나라 땅의 모습을 종이에 정확하게 옮기기 위한 노력의 기간이다. 이런 점에서 김정호와는 땔래야 땔 수 없는 인연이다. 그도 김정호가 친구같은 느낌이 든다고 한다. <대동여지도>완성과 '김정호 복원' 등 그가 온갖 정성과 노력을 다해 온 일들이 모두 김정호와 관련된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정호와의 인연 -- <대동여지도>를 완성하기까지
그와 김정호와의 인연은 그가 '지도 만들기'에 나서면서 부터다. 이우형의 지도인생은 그가 걸출한 산악인이었다는 점과 연관이 있다. 그는 대한산악연맹의 서울시연맹 구조대장을 지낼 정도로 젊은 시절을 산에서 보내다시피 했다. 산을 많이 다니다 보니 자연 지도를 공부하게 되고 또 많이 구입하게 되면서 지도에 익숙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지난 70년대 중반 신문사에 잠시 몸 담았던 경력과 이런 저런 일로 '산수 (山水)'라는 등산잡지를 발간하게 된 것이 지도인생의 한 사단 (事端)이 된다.
잡지사가 경영난으로 6개월만에 문을 닫게 됐는데 일 년치 구독료를 선불로 받은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고민 끝에 이우형은 평소 산행경험으로 쌓아 둔 자료를 바탕 으로 4색 컬러 등산용 지도를 부록으로 만들어 마지막 호 잡지와 함께 독자들에게 보낸다. "못 보내 드리는 잡지는 이 부록으로 대신해 달라"는 사과문과 함께. 그런데 이 지도가 예상외의 큰 호응을 얻었고 이를 계기로 그는 지도제작자의 길에 접어 든 것이다.
그 무렵 나온 경주와 제주도의 문화재지도는, 이를테면 그의 지도제작자로서의 첫 '작품'들이다. 당시 만든 경주와 제주도의 문화재지도는 그가 처음으로 '현장주의 지도'의 기법을 써 만든 것이다. 예컨대 제주도 성판악의 경우 현지에서 쓰는 말인 '성널오름'으로 표기하는 방법을 썼다.
그러다가 80년초에는 '광우당'이라는 전문 지도제작회사를 직접 운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채산성에 관계없이 제대로 된 지도를 추구하는 그의 성격상 얼마 안 있다 문을 닫는다. 당시 그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지도교과서인 '사회과 부도'를 제작할 정도의 전문인이 됐다.
이 무렵 이우형은 김정호를 만난다. 국토를 그리는 지도는 물론 역사를 아우르는 지도를 만들다 보니 피해갈 수 없는 것이 바로 고산자와 <대동여지도>였다는 이우형의 회고다. 이우형이 <대동여지도>를 처음 대한 것은 70년대 말. <대동여지도>를 대하면서 이우형은 놀라고 또 놀란다. 김정호의 '지도관'이 자신의 것과 맥이 통한다는 것을 느낀다.
"목판본 <대동여지도>를 살펴보는 사이 이 것이 보통 정성과 뜻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에게 헬리콥터를 한 대 주고 해보라고 해도 10년 세월은 족히 걸리겠다 싶었어요. 이와 함께, 도대체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방대한 작업에 손을 댔을까 하고 궁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대동여지도>를 보면서 이우형이 공감한 것은 그 <대동여지도>가 갖는 이른바 산경수경 (山經水經)의 개념.
"지도는 땅만을 그려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그 땅을 보는 심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땅의 환경은 유일한 것이고 우리식 표현이 있었을 것입니다. 등고선식으로 그린 오늘날의 서양식지도와는 달리 우리 선조들은 산경수경을 지도에 담았습니다. 이는 물줄기 중심의 산줄기 개념입니다. 지도는 읽기에 따라 수 없는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권 식생 문화 기후 농경권역은 단순한 등고선식 지도로는 알 수 없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이 모든 것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때를 기점으로 이우형은 <대동여지도>를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고지도 연구에 들어 가면서 <대동여지도>의 완성작업에 매달린다. 김정호는 당시 목각의 어려움 때문에 <동여도(東輿圖)>상의 옛 지명을 <대동여지도>에 다 넣지 못했다. 이우형은 이를 <대동여지도>에 몽땅 옮겨 놓는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생계는 팽개친 채 박물관과 도서관, 개인소장 등을 뒤지는 일과 답사 등 <대동여지도> 완성을 위한 각고의 10년을 보낸다. <대동여지도>의 기본도로서 현존하는 필사본이 세 벌에 불과한 <동여도>를 규장각, 국사편찬위원회 등으로 찾아가 일일이 손으로 베끼는 고역도 치러낸다.
그 기간동안 그는 우리나라 48개 국도 중 20개 정도를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 봤고 한강탐사도 했다. 때로는 허름한 옷차림과 보따리 나침반 지도 도시락 이런 것들 덕분에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다.
이 완성작업의 한 단순과정으로 이우형은 우선 85년 '<대동여지도> 영인본'을 제작, 발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우형의 연구는 많은 난관에 부닥친다. 이우형은 80년대 초 서울 인사동 고서점에서 우연히 우리나라 옛 지리서인 '『산경표』 (山經表)'를 발견한다. 그는 1769년 전북 순창출신인 여암 (旅菴) 신경준 (申景濬)이 펴낸 이 책을 <대동여지도>와 비교하며 연구에 들어가는데 서로 맞지가 않는 것이었다. 『산경표』상의 것과 <대동여지도>상의 것이 서로 틀린 것으로 돼 있는 것이었다.
왜 그런가. 이우형은 몇 날 밤을 새운 끝에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산을 우리적인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산은 영어에서 말하는 마운틴(mountain)이나 일본의 야마와는 다른 개념의 것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산을 정상(peak)의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있지만 우리 선조들은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 우리 옛 산의 개념, 즉 산경원리에서 이르는 우리 산의 뜻은 그 산자락 앞의 들까지를 포용한 하나의 덩치(규모) 였다는 것과 그 모두를 두고 어느 곳이든지 그 산의 이름으로 불렀다 는 것이다. 이런 개념으로 <대동여지도>에 대입을 하니 신통할 정도로 맞아 떨어지더라는 것이다.
이우형은 이같은 개념을 근본이론으로 족보형식으로 지도화한 산경도도 제작해 낸다. 또 하나 현대지형 산경도(그림 : 산경도) 도에서도 잘 나타나지 않은 능선줄기가 <대동여지도>에는 명확하고도 큰 선으로 나타난 지역이 있다는 점도 이우형을 날 밤으로 새게 하는 의문이었다.
한남정맥 끝 부분의 김포평야 일대가 특히 그랬다. 그 밋밋한 논바닥에 무슨 이렇게 굵은 산줄기가 있단 말인가. 이우형은 답답증에 자다 말고 일어나 "어디, 고산자 당신의 혼백이라도 있으면 나와 보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는 직접 답사에 나섰다. 김포평야에 가서 논의 모양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얼핏 보기에 거의 수평면인 김포평야였지만, 그 평야를 동서로 나누는 이른바 유역능선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이 유역능(선)을 확인한 순간이 전 작업을 통해 가장 감격적이었다고 이우형은 회고한다.
이러한 숱한 난관 끝에 이우형은 90년에 <대동여지도>를 완성해 낸다. 이우형은 김정호가 목각상의 어려움 때문에 <동여도>상에는 총 19,000여개였던 지명 가운데 7,400여개를 뺀, 11,700여개만 <대동여지도>에 판각했는데, 이우형이 이 누락된 지명을 일일이 확인해 추가시킨 <대동여지도> 3분의 2 축소판을 완성한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대동여지도>의 독도'라는 책자도 함께 발행, <대동여지도>의 가치를 새롭게 부각시킨다. 이우형에 의해 실로 100여년만에 김정호의 완전한 뜻이 이뤄진 것이다.
당시 이우형의 <대동여지도>는 풀 사이즈 크기로 국립박물관에 전시된다. 그의 이 작업은 김정호 <대동여지도>의 완성이라는 것 외에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각종 국학관계의 연구는 물론 앞으로 절실히 필요해질 국지기상예보 등에도 좋은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다.
김정호 복원에 바친 각고의 15년, 그리고 백두대간을 위하여
<대동여지도>의 완성작업을 하면서 그는 줄곧 김정호와 함께 있었다. 의문이 나면 혼자서 묻기도 하고 짜증이 나면 대들기도 했다. 이우형의 <대동여지도> 완성은 전생에 어떤 관계였던 간에 이우형과 김정호의 끈질긴 인연이 가져다 준 우연찮은 '사건'으로 꼽힐만 하다. 이우형의 10여년간에 걸친 <대동여지도> 완성작업은 어떤 의미에서 '김정호 제 모습 찾기'의 한 축일 수도 있을 것이며, 그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훌륭한 지도를 만든 자랑스런 우리 조상 김정호.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그의 일대기를 잘못 알고 왔고, 지금까지도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우형이 들려주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김정호 이야기는 이러했다.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지도 그리기를 좋아했고, 지도를 구하러 한양으로 올라와 대궐 안 규장각에서 지도를 얻어본 결과 실제 지형과 지도가 너무나 차이 나는 것을 확인했고, 이에 정확한 지도 만들기를 필생의 사업으로 정해 평생동안 백두산을 여덟 번 올랐고... 예순이 되던 1861년 <대동여지도>의 판목을 완성했으나 대원군이 다른 나라에 국내사정을 누설시키는 것으로 오해하는 바람에 옥에 갇혀 숨을 거두었고 판목도 압수당해 폐기됐고..."
이우형은 단언한다.
"김정호는 전국을 뺑뺑 돌지도, 백두산을 여덟차례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지도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 때문에 옥에 갇히지도 않았고 판목이 폐기되지도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런 기록은 우리 역사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대부분 왜 그렇게 알고 있었을까. 이우형은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1990년도판 전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렇게 기술돼 있었다. 그 당시까지 '조선인들은 그렇게 우매한 위정자와 뒤떨어진 과학기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지배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일제의 식민사관 교육의 잔재가 김정호의 인생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우형은 이를 바로 잡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 한다. 그 노력 중의 하나가 바로 목판 발견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목판은 1931년까지도 존재하는 것으로,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이것이 1934년판 조선어 독본에서 불타 없어졌다는 식으로 기술된 배경에는 바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위한 '의도된 왜곡'이 있었던 것이다.
30년대까지는 분명히 남아 있던 목판들이 어디 갔을까. 이곳 저곳의 지인들에게 협조를 부탁해 놓은 이우형에게 희소식을 전한 사람은 서지학자 이종학 (李鍾學) (전 독도박물관장)이었다. 해방당시 일제로부터 우리측으로 문화재가 인수.인계되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대동여지도> 목판본 인계서를 제공해온 것이다. 이를 토대로 이우형은 또 다시 숱한 탐문과 조사를 통해 마침내 95년 12월 그렇게도 찾던 <대동여지도> 목판 11장을 찾아낸다. 없어졌을 것이라는 통설 속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던 목판들이 이우형의 집념어린 노력 끝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물증을 확보해 낸 이우형은 그러나 마음이 차지 않았다.
"내 자신이 고산자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 중에서도 잠깐만 다른 생각을 하다 보면 '김정호는 그래도 전국을 답사했을 거야' '옥에 갇혀 숨진 게 맞을 거야' '목판은 불탔을 거야'하는 기존의 선입견이 문득문득 떠 오르더군요. 초등학교 때 받은 교육이 얼마나 머리 속 깊이 각인되는지에 대해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김정호에 대한 왜곡된 기술을 하고 있는 교과서가 있는 한 김정호의 모습은 계속 일그러져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우형은 교과서의 김정호 편 개정을 위해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 붙인다. 함께 뜻을 같이한 국사편찬위의 이상태 (李相泰)박사, 성신여대 지리학과의 양보경 (楊普景) 교수 등의 도움을 받아 당시 초등학교 국어교과서를 담당하고 있던 한국교육개발원 이인제 (李寅濟)박사 등 교과서 관련 인사들에게 자신이 수집한 자료와 교과서를 바꿔야 할 근거 등이 적힌 서류들을 보내기도 했고, 이들을 직접 만나 설득하기도 여러 번. 한 때는 논란의 소지가 많다는 이유로 김정호 부분이 아예 교과서에서 삭제될 위기에까지 처하기도 했다. 이우형으로서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김정호의 인생이 1934년 조선총독부의 조선어독본 제작이후 60년이상 일본의 식민사관에 이용된 것도 억울한데, 이 분야 한국사에 둘도 없는 그의 인생과 업적을 없는 것으로 하자니 기가 막힌 일이었지요."
그러나 이우형은 이에 주저 앉지 않고 교육계 등을 대상으로 집요한 설득작업을 계속한다. 중학교와 지리등 다른 과목 교과서 필자에게까지 로비를 벌일 만큼 열심이었던 그의 김정호에 대한 집념은 끝내 97학년도 5학년 1학기 교과서에 김정호의 개정된 진짜 이야기를 실리게 하는 결실을 거둔다.
이우형은 그해 11월 초 김정호를 기리는 차례모임을 주관한다. 그는 술을 올리면서 이렇게 고했다.
"선생님, 후손으로서 해드려야 할 최소한 예의를 50년만에야 차렸습니다. 이제 선생님의 어린 후손들은 재대로 된 선생님 모습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마음 편히 쉬십시오."
이우형은 그러나 아직도 김정호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학계는 그런대로 되고 있지만, 아직도 김정호에 관해 모르는 부분들이 너무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우형은 김정호가 60 나이에 겨우겨우 나무를 구해가며 혼자 힘으로 높이가 6m60cm나 되고 목판개수는 1백20여개나 되는 거대한 지도 목판을 판 것은 그의 나라와 땅과 백성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강조한다.
"김정호의 다른 지도인 청구도 (靑邱圖) 서문에 보면 고산자는 '애국이란 그 땅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그 땅에 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땅을 사랑하려면 땅의 됨됨이를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지도와 지리지를 온 백성이 보아야 한다는 게 고산자의 생각이었죠.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도 온갖 어려움에 시달리며 나무를 파고 또 고치고 또 파고 하는 고산자의 10년 집념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고지도 연구가로서 또한 지도제작자로서 이우형은 지도 만들기와 관련해 '생활지리'를 강조한다. 지도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과 땅과 산과 물을 보는 심성이 나타나 있는 만큼 산수경 (山水經)의 개념을 바탕으로 해야 하며, 이를 도외시하면 그 시절 사람이 그 땅에 살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지리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는 산줄기의 개념이 아직까지 산맥 개념으로 다뤄지고 있는 점을 안타까워 했다.
"한시 바삐 이 땅의 산줄기를 지도상에 제대로 표기하는 일도 본격화돼야 합니다. 우리 지리교과서상의 복잡한 산맥구도와 이름은 일본식 표현입니다. 우리 선조는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을 하나의 등줄기로 보고 (장백) 정간 하나와 13정맥으로 국토를 파악했습니다."
우리 산과 백두대간을 얘기하는 이우형은 산꾼 그 모습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그동안 잊혀져 왔던 백두대간을 『산경표』 등 고서적에서 찾아내 문제를 제기한 것도 다름 아닌 이우형이다. 그는 『산경표』를 통해 우리의 고유한 지리개념인 1대간 1정간 13정맥을 발굴하는 뜻 깊은 일을 해냈다.
"원론적으로 아직 정립이 안된 상태입니다. 나는 개념 정도를 파악해냈을 뿐이고... 우리는 지금까지 일제가 지하자원의 수탈을 위해 세운 태백산맥이니 차령산맥이니 하는 지리개념을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질학에서나 필요한 개념이지 우리 강토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는 거의 무용지물인 것입니다. 산에서 비롯된 물줄기의 흐름이 바뀌면 기후나 토양도 바뀌며 거기에 기대어 사는 사람의 품성도 바뀌는 것인데, 우리는 어처구니 없게도 그 일제의 지리개념에 의해 무감각해진 채 별 생각없이 우리 땅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이우형은 요즘 들어 산악인들을 중심으로 백두대간의 개념이 널리 확산되고 있고, 이와 함께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산행이 많아지고 있는 점은 우리 국토를 알고 사랑하는 차원에서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각종 난개발로 인해 백두대간이 망가지고 파헤쳐지고 있는데 대해서는 분노을 표했다.
이즈음 그가 정성을 쏟고 있는 작업은 산수경에 관한 책의 집필이다. 우리 지도의 기본개념인 산수경에 관해 그동안 말로만 해왔는데, 이제는 이를 이론으로 정립해 널리 알리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책을 집필 중에 있다. 이와 함께 그는 그의 본업인 지도제작도 하고 있다. 문화재지도를 의뢰받아 제작하고 있는데, '경주유적분포도' (5 천분의 1)는 완료했고, 지금은 안동대의 의뢰로 '안동지역 문화재지도'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이우형은 자신이 한 일, 그리고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말을 아끼는 편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는 겸손함의 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겸손함의 뒤에는 뭐라고 딱 꼬집을 수 없는 감정이 배여 있음이 느껴진다. 시니시시즘 (냉소주의) 같기도 하고 저항감 같기도 한... 그는 김정호를 연구하고, <대동여지도>를 완성하고, 산수경 개념의 우리 지도를 연구하면서 거의 사재를 쏟아 붇다시피 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당하고 느낀 고초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와 만나는 과정에서 그는 '혼자 할 수 없는 일' '해도 누가 인정을 해 주겠는가' '개인적으로 연구하는 것 한계가 있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이우형은 그가 <대동여지도> 연구를 위한 답사과정에서 한강탐사를 함께 했던 한강의 마지막 뱃사공 우동봉 노인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한강의 마지막 뱃사공으로서 그 노인이 갖고 있던 자기 일에 대한 굉장한 자부심과 자존심에 얽힌 얘기들. 웬 뜬금없는 얘기인가 할 정도로, 그 노인의 얘기는 김정호라든가 <대동여지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우형을 몇 차례 만나고 한참을 지나 생각을 해보니 왜 그가 우동봉 노인 얘기를 했는지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것은 자신이 해놓은, 그리고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그 나름의 자부심의 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우동봉 노인이 뱃전에서 한강을 바라다 보면서 '이 한강 내꺼여!'라고 한 말을 이우형에 대입시켜 보면서 '아,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 글쓴이/ 김영철 선생 약력
1951년생
마산 중고등학교, 중앙대 신방과 졸업
1977년 내외통신 견습기자로 언론계 생활을 시작해 내외통신 국제부차장,
부산매일신문 정치부차장과 부장을 역임하며 21년간 언론사계에 종사.
1998년부터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
홈지기 덧붙임)
* 이 글은 고 이우형 선생님에 대해 가장 잘 정리해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선생님의 유지를 조금이나마 받들겠다는 다짐이 홈지기에게는 있습니다.
** 이 글은 '슈룹의 백두대간' 중에 실려 있는 것입니다. 슈룹에서는 글쓴이인 김영철님께 게재를 허락받았고, 현재 저희는 슈룹의 홈지기를 통해 글의 이용을 허락받은 상태입니다. 사진과 그림은 월간 「불광」(1996년 8월호)의 인터뷰 기사에 실려 있는 것으로 해당 출판사의 이용을 허락 받았습니다.
*** 글의 중간에 등장하는 『산경표』의 저자가 여암 신경준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산경표』가 신경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만은 확실합니다. (200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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